죽지 않는 복제인간 '서복', 그 이름은 진시황의 신하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영생을 갈망했던 진시황이 서복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즉 '서복'이라는 단어는 '영생을 향한 갈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서복과 함께하는 주인공 '민기현'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살했던 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서복은 죽지 않는다. 그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을까?
서복은 죽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특히 진시황은 기가 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했던 것처럼,
서복도 영원히 사는 것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했다.
영화에서는 서복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는 동물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어지면, 인간에게 인간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서복은 인간성이 없었을까?
서복은 영생할 수 있다고해서 마음대로, 막 살지 않았다. 즉 인간성을 지켰다.
더 나아가, 서복은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되는 것'을 간절히 바랬다.
즉,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영생은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니다.
영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영생할 것인가?
목적없는 영생, 의지할 곳 없는 영생은 축복이 아닌 저주일 수도 있다.
영화 <서복>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글에서 다룬 바와 같이,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천국과 영생'을 주는 것이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로 인간 모두가 영생하는 날이 온다고 할찌라도
영생이 축복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영생이 저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
영생 이상의 가치를 찾지 않는 이상, 육체가 영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을 인용하며 마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